전체 글1402 논산 개태사2 개태사(開泰寺)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개태사(開泰寺)는 고려 936년(태조 19)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세운 사찰이다. 근래에 들어와 수차례 발굴 조사되었는데, 최근 법당 등을 복원한 개태사 구역과 원래의 개태사지로 구분된다. 개태사지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이 있는 현재의 개태사로부터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개태사에 전하는 문화재로는 석조삼존불입상과 오층석탑, 철확 등이 있고 개태사지에서는 석조공양보살상과 석조(石槽) 등이 수습되었다. 개태사 마당에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은 개태사지에서 옮겨온 것인데, 원래는 석조공양보살상과 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즉 이 석탑 앞에 석조공양보살상이 탑전 공양보살상의 형태로 놓여 있었다. 현재 석조공양보살상은 개태사지 부근에 위치한 용화.. 2021. 4. 15. <가야산·백련암> 백련선사와 호랑이 백련선사와 호랑이 살을 에는 듯한 세찬 바람에 나무들이 윙윙 울어대고 눈보라마저 휘몰아치는 몹시 추운 겨울밤. 칠흑 어둠을 헤치고 한 스님이 해인사 큰절에서 백련암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허허, 날씨가 매우 사납구나.』 한 손으로는 바위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를 잡으며 신중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스님의 법명은 백련선사. 스님은 가야산 깊은 골에 외따로 암자를 세워 자신의 법명을 붙여 백련암이라 칭하고 동자 하나를 데리고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스님이 암자를 비우면 어린 동자가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홀로 암자를 지켰다. 오늘도 큰 절에서 주무시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스님은 막무가내였다. 사방이 어둠에 싸인 산길을 걷는 스님의 발길은 험한 날씨 탓인지 오늘따라 무겁기 만 하다. 잠시 서서 숨을 .. 2021. 4. 4. <경남·창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옛날 신라의 진산으로 알려진 백월산(지금의 경남 창원 북면 소재)아래 자리한 어느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란 두 청년 선비가 살고 있었다. 풍채가 좋고 골격이 범상치 않은 두 청년은 속세를 초월한 높은 이상을 지닌 좋은 친구였다. 이들이 20세가 되던 어느 가을날. 두 사람은 백월산에 올라 먼 산에 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이때 부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보게, 우리가 이렇게 평범한 생활에 만족하여 지낼 수가 없지 않은가.』 『자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나도 동감일세.』 두 청년은 그날 함께 출가할 것을 결심, 그 길로 마을 밖 작은 절에 가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부득은 회진암에, 박박은 유리광사에 각각 터를 잡은 뒤 밭을 일구며 정.. 2021. 4. 4. <화성·홍법사>홍랑각시의 영험 홍랑각시의 영험 『아니 중국 천자는 자기 나라에 여자가 없어서 조선으로 여자를 구하러 보냈나.』 『다 속국인 탓이지요.』 『아무리 속국이기로서니 조정에서 이렇게 쩔쩔매니 장차 나라 꼴이 큰일이구려.』 『자, 이렇게 모여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여자들을 피신시킵시다.』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누구네 집에 어떤 딸이 있는지 다 알고 있을 텐데.』 신통한 묘책이 없어 수심에 잠겨 있는 마을 사람들 앞에 드디어 관원들이 나타났다. 육모방망이를 든 포졸들을 앞세우고 외쳤다. 『얘들아, 마을을 샅샅이 뒤져 젊은 여자를 모조리 잡아 끌어내라.』 포졸들에게 끌려 나오는 여인들의 치마는 땅에 끌렸으며, 강제로 허리를 껴안고 나오는 포졸들의 입은 헤벌려 있었다. 마을에서 자색이 뛰어난 홍만석의 딸 홍랑 역시 발버둥.. 2021. 4. 4. 논산 송불암 송불암(논산) 송불암은 논산시 연산면 화암리 함박봉에 자리잡고 있다. 연산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자그마한 사찰이다. 태고종 사찰이다. 소나무가 부처님께 절을 하고있는 사찰로도 유명하다. 논산 함박봉의 송불암은 소나무와 미륵부처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지는 곳이다. 송불암이 위치한 자리에는 본래 고려시대부터 석불사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1946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에 살았던 동상태의 어머니가 2칸의 민가로 송불암을 창건하였다. 송불암은 1970년대부터 승려 경연이 주지를 맡고 있는데, 송불암이라는 명칭은 미륵불 바로 옆에 있는 250여년 된 노송이 불상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륵불은 당초.. 2021. 4. 3.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사적 제301호이다.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정림사지의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2021. 4. 1. 부여 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박물관(定林寺址博物館)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군립박물관으로 부여의 상징적인 문화유적인 정림사지를 발굴·연구·관리·전시함으로써 백제문화를 재조명하고 지역주민의 문화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종합문화공간으로서 설립되었다. 정림사지는 일제강점기 이후 백제탑공원으로 이용되었으나 1979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사지(寺址) 전모가 밝혀졌으며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연구·관리·전시하기 위해 2006년 9월 정림사지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이후 2008년 5월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재되어 현재 정림사지박물관에 이르고 있다. 상설전시관 2관(백제불교문화관, 정림사지관), 특별전시실 1실, 야외전시실에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연구사업으로 백제문화 관련 사업을 추진 중에 있으며 매년 2.. 2021. 4. 1. <이천·영월암>나옹스님의 孝心 나옹스님의 孝心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 고려의 유명한 스님 나옹화상(1320∼1376)은 춘설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길을 시자도 없이 혼자 걷고 있었다. 지금의 양주 땅 회암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이천 영월암이 있는 설봉산 기슭을 오르는 스님의 발길은 찌뿌듯한 날씨처럼 무겁기만 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가까이서 울리는 요령소리가 스님의 귓전을 울렸다. 『허, 또 누가 이생을 하직한 게로군.』 자신의 출가 당시 화두였던 사람이 오고 가는 생사의 도리를 되뇌이면서 막 산모퉁이를 돌아서려던 나옹 스님은 초라한 장의 행렬과 마주쳤다. 상여는 물론 상주도 없이 늙수구레한 영감이 요령을 흔들며 상엿소리를 구슬피 소리하며, 그 뒤엔 장정 하나가 지게에 관을 메고 무거운 듯 힘겹게 걷고 있었다. 바로 뒤엔 두 명의.. 2021. 4. 1. <경기 연천>재인폭포 설화 재인폭포 설화 경기도 연천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하는 족족 다음 날 아침에 폭포에 빠져 익사한 채로 발견되는 일이 벌어진다. 흉흉한 소문이 퍼지자 아무도 그 고을의 사또로 부임하지 않으려 하는 와중에, 그해 장원에 급제한 젊은 선비가 특별히 임금의 명을 받고 신관 사또로 부임해 온다. 부임한 첫날 밤에 불을 켜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또의 앞에 소복을 한 원귀가 나타난다. 원귀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꾸만 폭포 쪽을 가리켜 보이다가 닭이 울자 사라졌다. 분명히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사또는 다음날 사람을 시켜 폭포 밑을 뒤지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나왔다. 여자는 소복 차림에 쪽진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또는 여인이 폭포 위에서 발을 헛디뎌 죽은 것으로 생각하.. 2021. 4. 1. 부여 미암사 미암사(米岩寺) 충남 부여군 내산면 저동리에 위치한 나즈막한 계향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서기 602년 백제 무왕 4년에 관륵이라는 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모두 전소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199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미암사(米岩寺)의 미(米: 쌀 미)가 뜻하는 것은 에 「米 는 천축(인도)에서는 사리(舍利)라 한다. 불사리(佛舍利)가 쌀알과 같으므로 이렇게 부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米는 진신사리를 의미하고 따라서 미암(米岩)은 사리로 뭉쳐진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미암사가 최근 일반 참배객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세계최대 와불이라고 불리는 와불이지만 이전에는 바위에서 쌀이 나왔다는 전설을 지닌 거대한 쌀바위 때문인 것 같다. 사찰 초입을 .. 2021. 3. 29. 열반상과 와불 ◇ 석가모니부처님은 쿠시나가라의 사라나무 숲에서 自燈明(자등명) 法燈明(법등명)이란 열반송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셨다. 와불은 바로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것이다. 열반은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청정한 경지를 의미한다. 범어(梵語) Nirvana 의 음을 따서 니반나(泥畔那),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라고 하며, 멸(滅), 적멸(寂滅), 멸도(滅度), 원적(圓寂), 안락(安樂), 해탈(解脫) 등으로 번역한다. 현재 인도 쿠시나가르에 있는 마하파리니르바나사원의 열반당에 최초로 조성되었다는 부처님의 열반상이 있다. 이 불상은 5세기에 하라발라스님이 진흙과 모래로 조성해놓은 열반상으로 길이는 6.2m라고 한다. 열반상은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서쪽을 향하여 누.. 2021. 3. 29. 부여 무량사 무량사(無量寺) 충남 부여군 외산면에 무량사가 있다. ‘무량’(無量)이라. 셀 수 없다는 말이다.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곳은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바로 이곳 무량사이다. 무량사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걸으면 졸졸 흘러내리는 개울물 소리가 귓속과 마음속에 낀 세속의 먼지를 말끔히 씻어 내며 그대로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듯하다. 어느덧 숲속에 아늑히 자리 잡은 절집에 이르고 있다. 전란으로 크게 불탄 뒤, 17세기 초인 인조 때 대대적인 중창 불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탑 뒤의 극락전은 우리나라 건축물에서 보기 드문 2층 집으로, 조선 중기 건축물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무량사는 행정구역으로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지만, 무량사가 자리 잡고있는 만수.. 2021. 3. 29.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11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