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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여행-전남110

강진 백련사(白蓮寺)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 2015. 7. 6.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형식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건물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 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山亭)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 2015. 7. 6.
강진 사의재(四宜齋)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전남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머물던 주막집이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조화롭게, 가지런히 .. 2015. 6. 25.
강진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 은행나무 전남 강진군 병영면 병영성로에 있는 기념관으로, 네델란드 풍인 기념관에 들어서면 '하멜표류기'가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관에는 하멜이 살던 당시 네델란드 생활기구등이 많이 전시돼 17세기 조선과 네델란드와의 생활상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역사의 인물을 소재로 지역전체를 아우르는 기념공간을 마련하기는 강진군이 처음이다. 하멜기념관은 네덜란드에서 기증받은 튤립과 들국화로 공원이 조성되고 풍차도 건립되었다. 남도답사 일번지의 특색있는 체험공간으로 자리잡았다. 하멜은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하여 제주도에 10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한양으로 압송된 후 1655년 청나라 사신의 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구원을 호소하다 실패하였고 1656년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1666년 여수를 탈출하기까.. 2015. 6. 25.
강진 전라병영성과 홍교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과 홍교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병영성로 180)에 있는 병영성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병영성이다.(사적 제397호 지정) 조선조 600년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주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 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2015. 6. 23.
강진 옴천사(唵川寺) 옴천사는 강진 옴천면 정정리 산정물에 위치한 사찰로 후삼국시대 송악에 고려태조 왕건 부친의 터전을 잡아주고 후삼국 통일의 성주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신 신라 4대 고승 가운데 한분이신 도선국사께서, 영암 도갑사, 광양 백계산 옥룡사와 모친을 모시고 계셨던 광양 운암사와 .. 2015. 6. 15.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무위사(無爲寺)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칭했다는 기록이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 전하나, 이는 원효스님의 생몰(生沒)연대(617-686)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후의 연혁은, 삼국통일 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 2015. 6. 11.
강진 금곡사(金谷寺) 강진읍에서 작천면으로 넘어가는 까치내재에 이르면 마치 중세시대 성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거대한 석문으로 가로막혀 계곡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서는 그 흔적조차 짐작할 수 없는 금곡사라는 오래된 사찰을 발견하게 된다. (전남 강진군 군동면 파산리 ) 이 사찰을 금곡사라 한 것은 이.. 2015. 6. 11.
강진 영랑생가(永郞生家) 강진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서 태어난 시인 영랑 김윤식을 자랑하고 사랑한다. 강진 사람이 아니라도 영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우리 시에 보탠 윤기 나는 서정의 물줄기를 잘 기억할 것이다. 동백나무 몇 그루가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둘러선 그의 생가에는 복원된 초가 안채와 마.. 2015. 6. 11.
완도 예송리(禮松里) 깻돌해변 예송리(禮松里) 깻돌해변 전남(全南) 완도군(莞島郡) 보길면(甫吉面) 예송리(禮松里)에 몽돌 해변이 있다. 대한민국 지도를 보면 보길도가 서울에서 얼마나 먼지 알 수 있다. 완도에서도 배로 갈 수 있지만 해남 땅끝마을에서 가면 30~40분 정도 걸린다. 노화도 ‘산양’ 선착장에 닿는다. 버스나 자가용을 이용하여 노화까지 가면, 보길도 입구에는 붉은색 ‘보길대교’가 노화도와 보길도를 이어준다. 보길대교를 지나 청별항에서 예송리 해수욕장으로 10여분 가면 길가에 예송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닿는다. 여기서는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추자도와 제주도도 보인다. 검은 바둑알 같은 돌로 이루어진 까만 예송리 해변이 발아래 펼쳐진다. 파도소리와 함께 돌멩이 구르는 소리도 들려온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마을 입구에서.. 2015. 5. 6.
완도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글씐바위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글씐바위 보길도 동쪽 끝의 백도리 마을 해변 석벽에 글씨쓴바위(글씐바위)가 있다. 글씐바위의 유래는 조선시대 선조 ~ 숙종 때의 대유학자이며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1607 - 1689)이 1689년 (숙종15년 ) 장희빈이 낳은 왕세자 책봉문제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려 관직이 삭탈된 뒤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가, 보길도 어느 바위밑에 잠간 머물면서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새기어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그때 나이 83세 인데도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치솟아 손수 글을 새겼다고 하지만 믿어 볼 수밖에... 주민들은 이 바위를 탄시암(嘆詩巖)이라고 했는데 요즘와서 글씐바위라 한다. 우암은 이곳에 며칠 머물면서도 부용동 세연정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2015. 4. 24.
완도 세연정(洗然亭) 세연정(洗然亭) 보길도(甫吉島)는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는 섬으로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해남군 땅끝에서 12㎞ 떨어져 있고, 노화도 남서쪽 3.8㎞ 지점에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 1671)가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보길도는 그가 인조 15년(1631) 51세 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으며, ‘어부사시사’와 같은 훌륭한 시가문학을 이루어 낸 곳이다. 또한 그가 섬 안의 바위와 산봉우리에 붙인 이름은 아직도 남아있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세워 ‘곡수당’이라 하고, 그 건너 산중턱 위에 집을 지어 ‘동천석실’이라 하였다. 계곡.. 2015.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