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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 사찰 & 함께 가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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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지리산 천은사 천은사(泉隱寺) 전남 구례군 지리산 노고단 성삼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천은사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828년(흥덕왕3)에 덕운선사(德雲禪師)와 인도에서 온 승려 스루가 창건하였고,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불탄 뒤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고 바꾸자 그 뒤로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李匡師)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 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 뒤로 재앙이 그쳤다.. 2021. 10. 19.
남원 지리산 정령치 정령치(鄭嶺峙)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 사이에 있는 고개(해발 1,172m)인 정령치는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령재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눈앞에 유순하게 흘러내리는 만복대가 다가오고, 운봉평야가 멀리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꾸불꾸불하게 포장된 정령치 도로도 보인다. 반야봉의 큰 덩치가 시야에 잡혀 사방의 전망이 탁 트인 게 시원하다. 또한 동쪽으로는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성삼재와 왕시루봉, 서쪽으로는 남원시가지가 보여 전망이 뛰어나다. 이 뿐만 아니라 지리산 주능선 일백리를 한눈에 바.. 2021. 10. 19.
남원 실상사 실상사(實相寺) 전북 남원시 산내면(山內面)의 지리산(智異山) 기슭 평지에 있는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었는데.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풍수지리의 자리인 것을 알고 실상사를 지어진 것이라 한다. 특히 증각대사 홍척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太子) 선광(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 2021. 10. 19.
남원 지리산 달궁 달궁유적 (達宮遺蹟) : 지리산 기슭에 거의 망가진 채로 남아 있는 옛 성터가 있다. 마한의 궁터였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전북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달궁마을에 사다리꼴의 평탄한 대지에 동서로 100m, 남북으로 80m나 되는 황성옛터가 달궁 터라고 알려져 있다. 삼한시대 때 마한(馬韓)의 효왕(孝王)이 진한(辰韓)의 공격을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을 쌓고, 궁을 세웠는데 그 궁이 있었던 자리가 바로 달궁 터라고 한다. 이에 관련된 기록은 조선 숙종 때 쓰인 “용성지(龍城誌)”에 적혀 있다. 건물의 초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열을 이루는 석축들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기와 편과 토기 편 들이 수습되었는데 토기 편 중에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 돌탑이란 옛 부터 전.. 2021. 10. 19.
임실 논개생가 주논개(朱論介) 生家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위치한 논개생가마을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인 게야무라 로꾸스매를 껴안고 진주 남강 의암에서 투신한 논개. 열아홉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오로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그녀를 잉태한 마을이다. 이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대곡리 저수지를 지나게 되는데, 원래는 논개 생가가 저수지로 수몰되기 전에 이곳에 있었는데 1986년 대곡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위쪽으로 옮겨 지금의 마을로 복원하였다. 깊고도 깊은 산골, 장수에서도 깡촌에 속하던 대곡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400년쯤 전이다. 논개의 부친인 주달문(朱達文)진사가 건너편 범바위골이라는 마을에서 이주해 터를 잡고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사람들은 이곳을 주 진사가 사는 곳이란 뜻으로.. 2021. 10. 19.
임실 장구목(천담리) 천담리 장구목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진메(뫼)마을 ,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 전북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내룡마을 장구목. 세 곳의 주소를 둔 천혜의 비경으로 딱히 어느 곳이라고 지명하기 힘든 곳이다. 걷기를 작정하고 걷는 다면 덕치면사무소에서 진메(뫼)마을→천담마을→구담마을→장구(군)목 순서로 약 8.5Km 를 트래킹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메마을을 건너띄고 천담마을 부터 시작한다면 강진면사무소에서 717번 국도를 따라 10분정도 남하하다가 천담교에서 우회전해서 천담리로 진입히면 된다. 편도 5km 정도의 거리이다. 네비게이션이면 천담리로 직접 안내한다. 평지이고 강변을 따라 걷기 때문에 누구든 가능하고, 시간도 천천히 걸어서 편도 약 2:30 시간 정도면 족하다. 500리 강줄기를 굽이 굽이 돌.. 2021. 10. 19.
임실 오수견공원 오수견(獒樹犬)과 의견비(義犬碑)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園東山) 공원에 있는 개의 비석. 이 비석은 높이 220㎝, 폭 95㎝, 두께 30㎝로 화강암 소재에 전후로 각자(刻字)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우며, 냇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55년 4월 현 위치에 다시 옮겨 놓았다.  의견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 거령현(임실군 청웅면(靑雄面)의 백제시대 행정구역이지만, 지금의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사는 김개인(金蓋仁)은 개를 아주 사랑하여 항상 데리고 다녔다. 어느 해 이른 봄, 개를 데리고 장이 선 오수로 장보기를 나갔는데 너무나 술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만 날이 저물어 버렸다. 그는 몹시 취하여 개와 함께 집으로 가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 2021. 10. 19.
부안 내소사 내소사 (來蘇寺) 내소사는 百濟 무왕 34년(633)(新羅 27대 선덕여왕 2년)에 혜구두타(僧 惠丘頭陀)스님이 창건하면서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 하였다. 중국 당나라 고종 때 武將이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연합으로 백제를 칠 때 나당(羅唐)연합군을 지휘하며 이곳에 들려 시주하면서 소래사(蘇來寺)에서 내소사(來蘇寺)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하지만 근거는 없다. 그래도 재미있는 전설이다.(혜구두타 僧은 이름이 바뀔 것을 예견했다는데 정말일까(?))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모든 이는 가벼운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50년 생 전나무 5백여 그루가 만든 600여m 숲 터널은 사람을 작게, 겸손하게 만든다. 호젓한 숲길을 한 걸음 내딛고 심호흡 한번하고, 하늘 한번보고, 또 한.. 2021. 10. 19.
부안 개암사 개암사(開巖寺)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절.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弁韓)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634년(무왕 35)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개암사지」에 의하면 개암사는 옛 변한(弁韓)의 왕궁 터였고, 그후 백제 때 묘련(妙蓮)왕사가 궁전을 고쳐 개암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작은 나라의 궁터가 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676년(문무왕 16)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이르러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1276년(충렬왕 2) 원감국사(圓鑑國師)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2021. 10. 19.
무주 나제통문 나제통문(羅濟通門) :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석굴(石窟)로 된 문으로 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인공동굴로서,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덕유산국립공원 경역(境域) 안에 속하며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입구에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윗부분에 ‘羅濟通門(나제통문)’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구천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고 한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부락인 무풍 방면의 이남(伊南)과 무주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서 행정구역으로 모두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각.. 2021. 10. 19.
남원 광한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조선시대 지방관아에서 조성한 대표적 관아정원이다.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池園)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정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어, 독특한 이런 조경양식의 표본이다. 선조 때 전라도 관찰사 정철이 광한루 앞에 요천의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뜻하는 못을 파고, 네 개의 반월형 교각으로 된 오작교를 놓아 정원을 조성하였다. 광한루 (廣寒樓)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는 조선 세종 때 황희가 처음으로 이곳에 광통루(廣通樓)를 지었으며, 인간이 신선(神仙)이 되고픈 이상향(理想鄕)인 하늘의 옥황상제(玉皇上濟)가 살던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지상에 옮겨 놓은 .. 2021. 10. 19.
김제 금산사 모악산 금산사(母岳山 金山寺) 靑山은 발아래 넓은 들판을 키우고 들판은 가슴속에서 山을 그리워하며 들판은 어머니(山)의 품안에서 자란다. 모악산과 호남평야, 평평하게 넓은 들판에 갑자기 둥글고 밋밋하게 솟은 산, 이 산아래에는 모두 ‘金’字로 시작되는 고을 들이 있다. 금평(金坪), 금산(金山), 금구(金溝), 김제(金堤) 등등이 그렇다. 이곳은 예로부터 금(金)이 많이 나오던 곳으로 구전에 의하면 모악산 아래에 사람의 신체 일부와 똑같은 금덩어리가 땅에 흩어져 묻혀 있었는데 머리와 팔, 다리부분은 일본인들이 찾아 다 캐가고 이제는 몸통부분만이 어딘가에 남아 있어, 그곳을 찾지 못하게 지명의 첫 글자에 금(金)을 넣어 부르게 하여 지금까지 내려온다는 얘기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옛 부터 모악산 골짜기에.. 2021. 10. 19.